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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천 박사 호서대학교 산학협력단 특임교수 전 노인보호전문기관 관장 |
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오디세이』를 두 번 보았다.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하나의 중요한 질서가 있다. 바로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를 ‘크세니아(Xenia)’라고 불렀다. 손님과 이방인을 환대하는 법이다. 당시 사람들은 제우스를 ‘제우스 크세니오스(Zeus Xenios)’, 즉 나그네와 손님을 보호하는 신으로 여겼다. 낯선 사람이 찾아왔을 때 그의 신분부터 묻지 않았다. 먼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어주고,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가진 사람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 낯선 사람이 혹시 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디세이』가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곧 그 사람의 품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이야기를 오늘의 노인장기요양 현장에 가져와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우리는 돌봄을 받는 사람만 존중하고 있는가
요양시설에서 매일 어르신을 돌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르신의 식사를 돕고, 옷을 갈아입히고, 휠체어를 밀고, 이동을 돕는다. 배설을 돕고, 목욕을 시키고, 약 복용을 확인한다. 밤새 어르신의 상태를 살피기도 한다.때로는 가족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견뎌낸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노동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노인장기요양서비스에서 어르신의 인권은 당연히 중요하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르신의 인권을 지키는 사람의 인권 역시 중요하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도 사람이다. 그들에게도 인격이 있고, 노동권이 있고, 휴식할 권리가 있다. 부당한 요구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도 있다. 그리고 자신의 경력과 숙련에 걸맞은 정당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명감이 임금을 대신할 수는 없다
사회복지 현장은 오랫동안 ‘헌신’과 ‘사명감’을 강조해 왔다. ‘어르신을 섬기는 일이니까. 복지기관이니까 어쩔 수 없지, 정부에서 정한 수가가 이 정도니까.’
이런 말들이 반복되는 순간, 돌봄 노동의 가치가 오히려 가벼워질 수 있다. 사명감은 노동의 중요한 가치일 수 있다. 그러나 사명감이 노동의 대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요양보호사가 전문적인 돌봄을 제공한다면 그 전문성에 걸맞은 보상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경력과 숙련에 대한 보상이다. 5년 동안 일한 요양보호사와 10년 동안 일한 요양보호사의 경험과 숙련도가 같을 수는 없다. 치매 어르신의 행동을 이해하는 능력도,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능력도, 보호자와 소통하는 능력도 다르다. 그런데 현장의 임금체계가 그 차이를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가.
그래서 이제는 단순한 ‘처우개선’이라는 표현을 넘어 경력과 숙련을 임금으로 인정하는 체계적인 임금체계를 고민해야 한다.
최저임금으로 최고의 돌봄을 요구할 수 있는가
2026년 현재 실제 활동하는 요양보호사 가운데 60대 이상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2026년 요양보호사 자격증 소지자 중 실제 활동하는 요양보호사 10명 중 7명은 60대 이상이다. 나이 있는 여성 요양보호사가 일하는 직업으로 이미 인식이 되었다. 요양보호사 자격 취득자 평균 연령은 54.5세이다(연합뉴스). 2043년까지 100만명이 더 필요한 돌봄 인력을 외국인 유입만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극단적 회피에 가깝다. 앞으로 돌봄 인력은 더욱 필요해지는데, 그 일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최저임금. . . . . 이것만으로 충분한가.
최저임금은 말 그대로 노동자가 받아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다. 돌봄의 전문성과 경력까지 평가하는 임금체계와는 다른 문제다. 더구나 요양보호사에게는 높은 수준의 책임과 감정노동이 요구된다. 어르신의 일상생활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원하고, 때로는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판단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한다. 최저임금만으로 사람을 붙잡아 놓고 최고의 돌봄을 요구해도 되는가.
‘개선’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대로 설계해야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장기요양 현장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다. 처우개선비가 지급되고 가산제도도 운영되고 있다. 분명 필요한 변화이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왜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돌봄 노동자의 임금은 늘 ‘개선’의 대상이어야 하는가. 왜 처음부터 그 노동의 가치에 걸맞은 임금체계를 만들지 못하는가.
이제는 1년, 3년, 5년, 10년의 경력과 숙련이 임금과 직무역량에 반영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호봉제는 오랜 숙원사업중 하나이다. 숙련된 요양보호사가 오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젊은 사람도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경험 많은 종사자가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요양보호사를 위한 정책이 아니다. 결국 어르신을 위한 정책이고, 우리 사회 모두를 위한 일이다.
요양보호사의 이직은 어르신의 불안으로 돌아온다
돌봄은 물건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오늘 나를 돌보던 사람이 내일 바뀌고, 또 그다음 날 새로운 사람이 온다면 어르신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치매를 앓고 있거나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운 어르신에게 익숙한 요양보호사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안정감이 된다. 따라서 숙련된 요양보호사가 오래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종사자 처우개선을 넘어 돌봄의 질을 높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 중 하나다.
사람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장기요양정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환대는 보호자에게도, 종사자에게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보호자는 요양보호사의 노고를 이해하고 감사해한다. 그러나 일부 보호자의 지나친 요구와 반복적인 민원, 무리한 요구, 때로는 인격을 무시하는 언행은 현장 종사자에게 상당한 부담이 된다. 요양보호사는 ‘고객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전문적인 돌봄 노동자다. 물론 종사자 역시 보호자와 어르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존중은 일방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환대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다.
어르신도 존중받아야 하고, 보호자도 존중받아야 하며, 요양보호사도 존중받아야 한다. 서로의 권리와 경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건강한 돌봄 관계가 만들어진다. 성경은 오래전에 답을 주었다.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명기 25장 4절)
곡식을 떠는 소가 먹을 수 있는 길을 막지 말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훗날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에서도 다시 인용된다. 일하는 존재에게 그 일의 열매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오늘의 돌봄 현장에 이 말씀을 가져와 보면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의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들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겨서도 안 된다.
그들이 흘린 땀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것은 특별한 요구가 아니고,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다.
2027년 장기요양 수가가 묻는 것
2027년 최저임금은 2026년보다 3.7% 인상됐다. 이제 관심은 2027년 노인장기요양 수가가 어떻게 결정될 것인가에 쏠린다. 수가를 얼마나 올릴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돌봄 노동의 가치를 사회가 얼마로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수가가 오르면 그 재원이 실제 종사자의 임금과 처우개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단순히 기관의 회계상 수입이 늘어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가산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 되고, 처우개선비를 지급했다는 것으로 정책적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이제는 ‘얼마를 개선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임금체계를 만들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따라가는 임금체계가 아니라, 경력과 숙련, 책임과 전문성을 인정하는 적정임금 체계가 필요하다.
『오디세이』에서 낯선 나그네를 먼저 환대했던 이유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건강한 내가 언젠가는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할 수 있다. 그때 나를 돌보는 사람이 불안한 마음으로 일하고 있기를 바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충분히 쉬고,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돌보기를 바랄 것인가.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한다. 3천여 년 전 『오디세이』가 말한 환대의 법은 오늘도 유효하다.